에머슨은 이런 경험담을 전한 적이 있다. 나는 매우 겸허한 존경심으로 어떤 부인의 경험담을 경청한 적이 있습니다. 그녀는 옷을 잘 입었다는 기분이 들 때 내적으로 매우 평온함을 느끼는데, 그런 평온감은 종교도 그녀에게 주지 못한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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유행과 죽음을 다룬 레오파르디의 대화편에서도 '모다(유행)'는 '모르떼(죽음)' 의 자매임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자랑스러워 한다. 모다는 자신을 못 알아보고 서둘러 갈 길을 재촉하는 모르떼를 불러 세워놓고는 우리 둘 모두 덧없음의 자식임을 상기시킨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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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것은 어쩌면 앞으로 형이상학적 차원에서도 '단명한 것'에 대한 사유의 확장을 자극할지도 모른다.
(철학광장 / 김용석 지음 - '허영의 관리라는 윤리적 과제 ' 中 )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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며칠 전 영어학원에서의 죽기 전에 무얼 하겠냐는 질문에 (영어학원에서 영어로 말하게 되면 진지한 얘기도 다른 사람 얘기인 양 할 수 있다.) 하루종일 틈틈이 생각해봤다
결국 드는 생각은 진짜 유명한 디자이너들의 값진 옷이며 가방, 신발들을 이것저것 다 걸쳐보고 싶다는 거였다. 보기만해도 군침이 도는 옷감의 질감이며 몸에 착 감기는 그 촉감, 선명하게 반짝거릴 그 색감들을 전부 다, 온 몸 그대로 느끼고 싶다. 이런 생각에 미치니 최근에 읽은 위의 책의 내용이 떠오른 것이다.
죽음 앞에서 결국 덧없는 것들을 찾게 되는 이유는 무얼까? 같은 질문에 학원에서 누군가의 대답은 그냥 막 몸 대 몸으로 싸우고 싶다는 거였는데, 나의 것과 비슷한 것 같다. 죽은 후에는 가질 수 없는 육체, 이 몸뚱아리를 가지고 아주 기본적인 욕구들을 마구마구 느껴보는 것 말이다. 보기에도 좋고 걸치기에도 좋은 육체의 감각에 성실히 봉사하는 비싼 옷가지들 앞에서 순순히 나의 모든 감각들을 모두 내어주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가.
그러나 이 대목에서 평상복으로는 입을 수 없는 극도의 예술적이고 사치스러운 컬렉션으로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했지만 40대 초반의 나이로 자살을 택한 알렉산더 맥퀸이 떠올려지는 것이다. '모드'와 '죽음'. 이 모두를 삶 가까이에 두고 지내며 덧없음에 몸부림쳤을 그의 삶이 안타까운 것은 완벽한 패션을 실천하는 것만이 삶을 깊이 위안하는 것은 아니라는 반증일 것이다.
몇 달 전에 친구들과의 대화 중에 '샤넬'백이 700만원대가 넘는다는 얘기를 듣고 진심으로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. 아, 정말로 갖고 싶지만, 도저히 그 돈으로 가방 하나를 산다는 것은 죄책감이 들 수 밖에 없을 것 같다.
'옷을 잘 입었을 때의 평온함'과 '과도한 소비 후의 죄책감' 사이에서 오늘도 <어제 사지 못 한 그 것>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는 비천한 나의 영혼.
나는 오늘 유니클로에서 15,000원짜리 청바지를 하나 샀다.
소득 0원의 부녀자로서, 소비에 물든 나의 하루를 또 한 번 고백하는 밤이다.
알렉산더 맥퀸의 사치스러우며 아름다운 퍼포먼스와 그.
그리고 샤넬.